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이라네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이라네
  • 김초록 기자
  • 승인 2017.08.2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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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록 에세이> 내 마음의 정자(亭子)

자연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세워진 정자(亭子). 우리 조상들의 안목과 지혜를 헤아려보게 된다. 정자 주변에는 으레 절벽이 있고, 강이 있고, 산이 있고, 들판과 마을이 있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자연을 벗 삼고 있는 정자들은 세월의 거친 풍상에도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중간에 보수하거나 어쩔 수 없이 허물고 새로 지은 정자조차도 우리 조상들의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인공 건축물이긴 하지만 정자가 들어선 자리는 으레 절경이거나 전망지여서 누마루에 앉아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몇 시간이고 한담을 나눌 수 있고, 가부좌를 틀고 잠시 명상에 잠길 수도 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요즘 웬만한 아파트 단지 한쪽에는 유행처럼 정자 몇 동이 서 있다. 아파트 사람들을 배려한 건설 회사들의 마음씀이라지만 왠지 고졸한 멋은 풍기지 않는다. 주변에 자연이 없고(있다 하더라도 좁은 면적에 듬성듬성 심어놓은 수목이 전부다) 운치와 조화를 염두에 두지 않은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상생활에 이러한 우리 고유의 문화가 퍼져간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 소쇄원의 사랑채인 제월당

 

정자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낯모르는 사람이면 어떤가. 그네들과 나누는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사는 재미와 오가는 정을 느끼게 된다. 자연의 한 가운데 말없이 서 있는 정자는 곧 우리 역사이다. 거친 역사의 한 굽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가만가만 들려주고 있다. 사람들은 정자 자체가 지닌 깊은 뜻보다는 누마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더 쳐주는 것 같다. 장인들의 손길이 담긴 돌 하나, 기왓장 하나, 여기저기 금이 가고 빛이 바랜 처마와 대들보의 숨은 의미는 뒷전인 채 뭐가 그리 바쁜지 주마간산 격으로 휘 둘러보고는 자리를 뜨곤 하는데, 우리 문화를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 동안 정자를 찾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작년 가을에 찾았던 담양도 그 중의 한 곳이다. 죽향의 고장, 정자문화의 1번지,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본고장. 담양을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이렇듯 다양하다. 담양에는 선비들이 시문을 짓고 학문을 논하던 여러 개의 누정(樓亭)이 남아 있다. 면앙정(免仰亭), 송강정(松江亭), 명옥헌(鳴玉軒),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취가정(醉歌亭), 식영정(息影亭), 송강 정철의 별서(別墅) 등이 그것들이다. 봉산면 제월리 제월봉 높은 언덕에 있는 면앙정은 가사문학의 선봉인 송순(1493-1583) 선생이 창건했다.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전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했는데, 땅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쳐다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학상 뛰어난 터라고 평가받는 이 정자에 서면 멀리 추월산과 무등산이 아스라하다. 송순은 이 면앙정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는데, 그의 유유자적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10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고서면 원강리 언덕에 있는 송강정은 관직에서 물러난 송강 정철이 은거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유명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저술했다. 조선 중기의 명원(名苑)이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별서정원(別墅庭園)의 하나로 꼽히는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남도 답사 1번지다. 입구부터 훤칠하게 솟은 대나무들이 길동무가 돼 주고 귓전을 간질이는 새소리가 청아하다. 소쇄원의 원래 주인은 양산보(1503∼1557)로 그는 정암 조광조(1482∼1519)가 기묘사화로 귀양을 가게 되자 처가에서 가까운 이곳에 집이 딸린 정원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각 건물이 보여주는 여유로움과 멋, 운치, 수수함은 옛 선비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방문객들을 접대하는 광풍각(光風閣)을 비롯해 주인이 사랑채로 쓰던 제월당(霽月堂)과 그 옆의 오곡문(五曲門), 초가지붕으로 만든 대봉대(待鳳臺) 등 하나같이 고풍스럽다. 대봉대에 앉으면 들뜬 마음이 착 가라앉으며 편안해진다. 문명에 찌든 몸과 마음이 새롭게 깨어나는 느낌이다. 오곡문으로 들어가는 길 옆 담장에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慮)라는 글귀가 보인다.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의 오두막집’이라는 뜻이다. 정원에는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매화, 은행, 오동, 동백, 치자, 철쭉 등이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 정철의 혼이 깃든 송강정

 

소쇄원과 얼마 안 떨어진 곳엔 담양의 또 다른 정자, 식영정과 환벽당이 있다. 광주호의 푸른 물이 내려다보이는 식영정은 송강 문학의 산실이다. 16세기 중반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다.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이 정자는 사선정(四仙亭)이라고도 하며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탄생시킨 곳이다. 식영정 밑에는 부속건물인 부용당과 서하당이 조용히 방문객을 맞는다. 소쇄원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가사문학관이 있다. 가사문학관 바로 앞 강 건너에는 송강 정철이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16살부터 27살까지 김윤제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던 환벽당이 있다. 담양의 정자는 이렇듯 다양하다. 각각의 정자가 풍기는 멋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이다.

이듬해 봄에 갔던 강릉의 누정(樓亭)도 잊을 수 없다. 대관령과 동해바다를 옆에 둔 강릉은 오랜 세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오면서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경포대(관동팔경의 하나)와 붙어 있는 선교장(船橋莊)은 강릉의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옛 가옥이다. 개인 주택으로는 가장 넓다는 이 살림집은 조선시대 상류 계층이었던 전주 이씨 일가의 삶터로 알려져 있다. 강릉 사람들은 선교장을 곧잘 아흔 아홉 칸 집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쉰다섯 칸만 남아 아쉬움을 더한다. 선교장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活來亭)이다. 연꽃이 자라는 연못에 두 다리를 담그고 서 있는 모습은 단정하고 아담하다. 정자 이름은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觀西有感)’ 중 ‘위유두원활수래(爲有頭源活水來)’에서 따왔다고 한다. 벽면 전부가 띠살문으로 되어 있고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 접객용 다실(茶室)이 있다.

선교장에 활래정이 있다면 경포호 주변에는 해운정(海雲亭), 경호정(鏡湖亭),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석란정(石蘭亭), 창랑정(滄浪亭), 취영정(聚瀛亭), 상영정(觴詠亭) 같은 멋스러운 정자가 남아 있다. 경포호 죽도(竹島) 밑에 자리한 취영정(강릉시 강문동 소재)은 방1칸과 마루방 1칸을 두고 있다. 이 정자는 특이하게도 현판이 두 개인데, 전면에 전서체의 ‘聚瀛亭’ 현판이 걸려 있고, 측면에 걸려 있는 현판은 해서체이다. 강릉시 저동에 있는 방해정(放海亭)은 ㄱ자형 단층 팔작 홑처마 지붕에 크고 작은 2개의 온돌방과 마루방이 있고 그 옆에 부엌을 달아 살림집(정면4칸, 측면3칸)으로 쓰게끔 되어 있다. 앞쪽의 분합문(分閤門)을 열면 경포호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지었다. 경포대 북쪽 시루봉 기슭에는 금란정(金蘭亭)이 있다. 경포호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이 정자는 사인(士人) 김형진(金衡鎭) 선생이 지었다고 전하며 전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주변 풍광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와 같이 정자는 단순히 경치를 즐기고 학문을 논하던 공간만은 아닌 듯싶다. 정자는 마음의 집이며 사유의 곳간이다. 삶이 버거울 때 정자에 올라 자연을 바라보며 인생이란 무엇인지 곰곰이 되짚어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얼 바라겠는가. 우리는 그곳에서 자연에 파묻혀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던 옛 사람들의 체취를 맡을 수 있을뿐더러 인공미와 자연미의 조화를 배우게 된다. 정자는 우리네 삶을 아우르는 정신의 처소요, 마음의 안식처이다. 달 밝은 가을밤, 정자에 올라 명상에 잠겨보는 건 어떨까?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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